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에 대한 斷想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수치스런 국치와
가장 큰 국가적 재난의 대부분은
내부 분열로 인한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임진왜란은 동인과 서인의 당론 대립으로 인한
알고도 대비하지 못한 국가적 큰 재난 이었다면..
병자호란은 망해가는 명나라와
신흥 강국 청나라 사이에서 국제정세에 어두운
현실성 없는 외교 정책실패로
한반도에 국가가 성립한 이후로 발생한
가장 수치스러운 국치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불러온게 아닌가 싶다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당시의 중국 한족(漢族)은
중국이 세계문명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중국 주변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을
야만인 오랑케 등으로 표현되는 남만(南蠻),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중국 동쪽에 있는 조선과 만주족을
똑같이 東夷로 불렀으며(즉 동쪽에 있는 오랑케 족)
중국 말 잘듣고 거역하지 않는 우리 조선은
순이(順夷)로 부르며 순한 오랑케로 여겼고,
중국의 1/100도 안되는 인구(100만정도)로
명나라를 자주 침공하여 괴롭힌 만주족은
(훗날 청나라 세움) 역이(逆夷)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만주족과 꼭 같은
오랑케 족으로 불르고 있음에도 ...
우리는 만주족과는 다르다는 혼자만의 우월의식 속에서
1630년대 당시 오직 숭명(崇明) 화이(華夷)사상만
외워서 알고있던 대부분 선비들이
武將(무장)들의 의견을 무시한채
오직 명나라에 대한 숭배와 존경심 하나 만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철기갑 부대를 가진 청나라를
오랑케의 나라라고 우습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존감과 판단력으로
오로지 말(言)과 붓과 의지 만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맞섯다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戰爭인
병자호란의 비극적인 종말..!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불러온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당시 위정자의 생각과 행동을 생각해본다.
1637년 1월 30일은 조선의 인조 임금이 추운 겨울
허허벌판 삼전도(지금 잠실 석촌호 부근)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신하(臣下)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국치의 날이었다
(오랑케 홍타이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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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궤구고두례)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고두례는 본래 신불이나 직계 존친속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행하던 것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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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636년 인조14년]
(음력 :1636년병자12월14일~정축년1월30일]
조선이 계속 친명 배금(청)정책으로 일관하며
국호를 바꾼 청나라를 우습게 알고
명나라에 계속 연연하자
청나라는 명나라와 전면전에 앞서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기 위해
국호를 청나라 바꾼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인조 임금이 1637년(음)1월30일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또는 삼배구고두례)라는
신하(臣下)의 예(禮)로서 항복하고 마무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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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 작가가 쓴 "남한산성"을 읽고 ]
병자호란 당시 한 겨울에 2 달을 채 못 버티고
47일만에 전쟁에 패하여
청나라에게 신하(臣下)의 나라로 복종하기로 하는
"삼궤구고두례"로 마무리 되었지만
두달이 채 안되는 47일간의
짧은 전쟁기간 기간 임에도
남한산성내에 있었던 임금은 물론
모든 신하와 백성까지
한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모습들이
너무나 참담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라가 강력한 국방력(國防力)과 힘이 없으면
평화는 물론 나라마져 지킬수 없고...
결국에는 강대국에게 짓밟혀 나라가 망하게 되고
모든 국민이 굴욕적이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주변 국제정세와 자국의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국가의 안보나 나라의 안위보다는
몇명되지 않는 자기들의 작은 붕당의 이익과
그들의 신념만이 최고인양 우월시 하고 우선시 하여
정책적인 대안없이 무조건 용감하기만 하였던..
병자호란 당시의 지식인들이나 위정자들 처럼
어리석고도 무모한 생각과 판단을 하는
위정자들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