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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東. 西. 南. 北人)의 유래와 정여립의 난(亂)

담하(淡霞) 2021. 3. 14. 15:00

 
조선시대 당명(東. 西. 南. 北人)의 유래와
정여립의 난(亂)
1)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된 사유
조선의 대표적인 정당인 東人과 西人도 
한때는 모두 조선전기 성종 이래 훈구파와 싸운 
사림파 동지들이였다
사림파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라는 
네 차례에 걸친 훈구파의 정치 탄압을 물리치고  
드디어 제14대 임금 선조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권하자 마자 둘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 등용 문제였다 
삼사관료의 전형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이조전랑에 사림파 김효원이 추천되자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이 
"김효원은 한때 훈구파 윤형원의 식객이었다"고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김효원의 전랑직 취임을 찬성하는 東人과..
반대하는 西人으로 나뉜것이 
東西 분당의 시작이었다.
東人과 西人으로 불리게 된것은...
김효원의 집이 광화문 東쪽의 건천동에 살고 있었기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을 東人으로 불렀고.. 
심의겸의 집이 西쪽인 정릉방(貞陵坊)에 살고 있었기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을 西人이라 불렀다.
2)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는 동인(東人)
이때 사림파에서 갈린 東人은 선조 22년(1598년) 발생한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南人과 北人으로 다시 분당한다
원래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서 서인이었던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후 서인을 탈당해 東人에 입당한 다음부터 
"이발(李潑)"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발"은 이것이(정여립과의 친분) 빌미가 되어 
죽게되었는데..
이때 정철에 이어 위관(委官)을 맡은 
東人 유성룡이 구해주지 않았다
"이발"은 결국 70세의 어머니 8세의 어린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는데 
서인이 몰락한후 정권을 잡은 東人중에서
 "이발"의 죽음을 동정하는 세력은 北人이되고.. 
유성룡과 우성전(禹性傳)을 지지하는 세력은 
南人이 되었다 
이발의 집이 북악(北岳)에 있었고.. 
우성전의 집은 남산(南山),  그리고 
유성룡의 본가가 영남인 안동지방이기 때문이다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중에서]
(이덕일. 이희근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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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발 ] :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인에 가담한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정랑에 오른 후 
당상관이 되어 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었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자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 
대죄하다가 그가 관련이 있어서 사퇴한 것이라는 
서인의 날조와 탄핵으로 의금부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이때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장살되어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악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 정여립의 난(亂): 기축옥사(己丑獄事) ]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 간 그와 연루된 많은 東人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역모로도 부른다.
이후 정여립의 난이 西人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현재는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정철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이 조작했다는 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공존하나..정설은 없다.
※ 위키백과에서 발췌 (HK) 
 
The Voice of Life / Hooman R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