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바다의 사나이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지금부터 170년쯤 전 크리미아 반도에
페오도시아라는 항구가 있습니다.
이태리어, 그리스어, 터키어, 타타르어 그리고
영어로 떠들썩한, 국제도시의 모습을 갖춘 곳입니다.
어느 날 페오도시아 시장은 도시 건물의 흰 벽에
숯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눈에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비범한 소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
수소문 끝에 그림을 그린 사람을 찾았는데
항구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가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선조가 미국 사람인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
(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였습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의 초상화)
아이바조프스키는 바다를 그린 화가 중에는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 ‘러시아 회화에서 가장 큰 별’이라는
영예도 받았습니다.
25살의 나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사실은
19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흥미 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나이에 러시아, 스투트가르트, 피렌체,
로마,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달빛 내리는 나폴리만)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 그의 주요 주제입니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초기 작품들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고요함이 있습니다.
물론 소위 "내공"이 쌓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르익으면 바다도 거칠어 지지만 말입니다.
시장의 도움으로 상페테스브르그 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된 아이바조프스키는
풍경, 특히 바다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제 생각이지만 태어난 곳이 바닷가였고 그래서
익숙한 것이 편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실제로 초상화나 일반 풍경화는
바다를 주제로 한 작품에 비하면 덜 매력적입니다.
(바닷가 그 고요)
봄 바다일까요?
물가에 서 노는 아이, 바닷가에 자리를 펴고 아이를 바라보는 여인,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배 그리고 잔잔한 물결. 모든 것들이
경계가 모호한 배경과 어울려 또 다른 고요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 나절, 물결이 밀려 오는 것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외국 유학의 혜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학을 가지 않고 크리미아 반도를 돌면서
자신의 풍경화 세계를 더욱 단련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실력도 좋은데다가 목표와 방법도 명쾌했습니다.
아마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운명을 주관하는 여신은
훗날까지 그에게 친절했던 것 같습니다.
(다릴 Daryal 협곡)
크리미아 반도에서의 내공 쌓기를 끝내고
유학을 간 이태리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홀란드를 여행하면서
전시회와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가는 곳 마다 성공을 거둡니다.
당시 그에 관한 신문 기사가 있습니다.
[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카오스’를 구입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가치가 있는 작품만 전시하는
바티칸에 걸었다.
그의 ‘카오스’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예술기교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
그림에 대한 신문의 평이 대개 호의적임을 감안해도
극찬에 가까운 기사입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 칼 브률로프 Karl Brulloff)
칼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은
러시아 회화에서 낭만주의의 승리라고
일컬어 지는 작품입니다.
또한 아이바조프스키의 몸 속에 내재되어 있던
창조적인 에너지에 불을 붙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흐름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러시아의 문화가
거대한 꽃을 피우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니콜라스 1세의
가혹한 전제정치와 불경기가
러시아를 휩쓸던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목격한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작품에 자유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시대 정신 등을 작품에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10번째 파도)
이 그림을 볼 때 마다 저는 공포를 느낍니다.
거대한 파도 앞에 난파를 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작고 보 잘 것이 없습니다.
날이 밝아서 파도는 모양이 더욱 생생합니다.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붉은 천을 손에 들고
구조를 기다리는 몸 짓이 있습니다.
인간 의지의 표현입니다.
파도의 몸 부림을 생생하게 그려낸
아이바조프스키의 테크닉도 좋지만
손에 들린 붉은 천의 의미는 더욱 좋습니다.
저런 붉은 천을 가지고
나도 세상을 향해 흔들어 본 적이 있었을까?
잘라 내버리고 싶은 인생의 한 부분을 지나면서
흔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달 빛 아래 콘스탄니노플 전경)
(달 빛 아래 오데사)
이태리에서 귀국한 그에게 러시아 해군은
일종의 종군 화가의 역할을 제의합니다.
지중해를 비롯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함대와 함께 움직이는 이 자리를
아이바조프스키는 기꺼이 수락합니다.
러시아 흑해 함대 소속으로 터키와 그리스,
그리고 스에즈 운하 개통 기념에 맞춰
이집트 그리고 미국까지 방문합니다.
미국에서는 워싱턴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는데 당연히
나이아가라 폭포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터키에서는 술탄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그 덕분에 오늘날
터키의 여러 박물관은 그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파도의 한 복판에서)
사진을 넘어 동영상을 보는 듯 합니다.
바다와 파도에 대한 그의 묘사를 두고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가 파도를 그리는 기법에 대한 설명을 보면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사전 스케치 같은 것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바다와 파도를
대강 연필로 그리고 난 후
바로 채색 작업을 했다고 하니까
그의 놀라운 기억력과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폭풍 1)
(폭풍 2)
(폭풍 3)
(폭풍 속의 메리호)
(달 밝은 바다)
거친 비바람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아이바조프스키를 두고 화가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픙경화가 터너는 천재라고 했습니다.
그림 말고도 아이바조프스키는
다재 다능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커피숍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보고 졸라서
배우는 법을 배우고는
바로 민속 음악을 연주합니다.
섬세한 음악적인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또 건축가로서 재능도 있었고
고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상페테스부르그 근처의 해안 풍경)
저녁 무렵인가요?
어부는 뱃전에 앉아 졸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팍팍한 삶에 대해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림이 사진보다 더 감동적이고
사실적이 있을 때가 있는데,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가까운 선술집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에는
시적(詩的)인 분위기가 정확한
지형 묘사와 함께 어울려
설득력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론 초기의 낭만주의에서
후반기에 사실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화풍이 변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詩시 한 두 구절은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놀 : 바닷가 사나운 큰 물결 )
많은 성공으로 돈을 번 그는
고향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짓고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바조프스키가 더욱 빛난 던 것은
번 돈으로 학교와 갤러리를 짓고
자산사업에 적극적이었던 점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6,000점이 넘습니다.
덕분에 러시아 화가 작품 중에서
가장 위조품이 많은 화가가 바로 그 입니다.
워낙 많으니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모사해서
진품이라고 하기 쉽겠지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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