繪畵(Painting)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담하(淡霞) 2019. 7. 16. 23:45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김홍도의 초상화 해학과 풍자의 대가 김홍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씨름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유머와 재치에 탁월한 사람이었는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씨름 한동안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민속놀이인 씨름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시들해져 가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홍도가 살았던 그 시대에도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씨름구경을 썩 즐겼었나 보다. 화면 가운데에 안간힘을 쓰며 씨름을 하는 두 씨름꾼을 자세히 보면 왼발을 든 쪽이 어쩐지 위태위태하다. 그림 아래쪽과 오른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승리는 따논 당상이라는 듯 몸을 뒤로 젖인채 입이 귀에 걸렸고, 그림 왼쪽편에서 응원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씨무룩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허탈하게 앉아있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는 씨름의 승패에 전혀 무관심한 표정으로 두 씨름꾼들에게 등을 돌린채 엿을 팔고있는 엿장수가 보이고 씨름꾼의 경기상황에 따라 울고 웃는 관객들의 엇갈린 반응이 마치 마당놀이 한 대목을 화폭 안에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긴장감 넘친다. 또한 그림의 오른편 아래쪽에 앉아있는 남자의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어쩐지 불안전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남자의 오른손과 왼손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김홍도는 자기가 그린 그림속 인물들의 손이나 발 모양을 종종 바꿔 그리곤 했다는데 이는 바로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숨은 그림찾기처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본래 이 씨름도는 스물 하고도 다섯 장으로 된 '풍속화첩'에 들어있는 그림 중의 하나로 김홍도는 이 화첩 속의 다른 그림에서도 사람들의 손이나 발을 가끔씩 바꿔 그리면서, 뒤바뀐 손과 발의 위치를 어렵게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할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며 홀로 미소 지었으리라.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마치 플롯이 잘 짜여진 연극 한 편을 직접 본듯 하다. 등장인물의 표정과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뿐 아니라 주변 상황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연극을 감상하는 우리 스스로가 어느새 그림 속의 배경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당 이 서당도는 훈장님 앞에서 우는 아이를 중심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는 학동들과 훈장님의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이 압권이라 할 수 있겠다. 훈장님께서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는 데도 무엇이 저리 서러워 아이는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일까? 아홉명 학동들의 표정은 물론 머리 모습까지도 한 명 한 명 세밀하게 담아낸 화가의 재능과 재치가 정말 놀라울 뿐이다. 빨래터 예나 지금에나 여인네들의 벗은 몸을 몰래 훔쳐보는 본능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나 보다. 빨래를 하면서 혹여 물에 옷이라도 젖을까 싶어 거리낌 없이 윗옷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네들을 남몰래 훔쳐보는 저 한량(?)좀 보시게나... 부채로 그 얼굴 가린다고 어찌 음흉한 속마음까지 가릴 수 있겠는가! 주막 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일하는 여인과 아이를 업은채 음식을 담는 여인, 그릇을 기우뚱 기울여 가며 바닥에 있는 음식을 싹싹 쓸어먹고 있는 장사꾼의 모습이 왠지 고단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부부행상 남편은 등짐을 지고, 아내는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각각 다른 곳으로 장사를 나가는 중인가 보다. 남편은 애를 등에 업고 무거운 바구니에 머리가 어깨까지 파묻히는 아내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 찢어졌을까? 저 부부가 하루라도 빨리 저 빈한하고 궁핍한 삶을 청산하고 보다 인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램해 본다. 고누놀이 고누놀이는 땅바닥에 말판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로 말을 써서 서로 상대편 말을 따먹거나 집을 차지하는 놀이라고 한다. 산으로 나무를 하러갔던 더벅머리 총각들이 자신의 키보다 높게 쌓은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가 숨을 돌릴겸 나무짐을 부려놓고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고누놀이 판을 벌였다. 웃통을 벗어제낀 두 사람과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친 또 한 사람은 놀이에 열중이고, 두 발을 얌전하게 모은 총각과 긴 곰방대를 입에 문 상투 튼 어른은 이들의 고누놀이를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는 정겹고도 그리운 풍경이다. 무동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으뜸으로 뽑히는 이 춤추는 소년은 풍속화적 성격이나 구성, 필력, 음악적 요소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풍각장이들의 섬세한 움직임과 표정 묘사는 얼쑤 얼쑤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춤을 추는 소년의 춤사위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흥겹기만 하다. 자리짜기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하는 성실한 한 가족의 삶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아이는 구석진 자리에서 막대기를 짚어가며 열심히 글공부를 하고 있다. 살림살이가 어지간만 했어도 아이에게 공부방 하나 내주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을텐데 오죽했으면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한방에 모여 각자의 일을 하고 있겠는가... 점심 힘겨운 노동 후의 점심은 비록 찬이 변변치 못하다 해도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는 꿀맛이었으리라. 등에 아이를 업은 채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들판으로 점심을 내왔을 아낙은 가슴을 풀어 헤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엄마를 따라온 큰아이는 엄마의 밥그릇을 통째 붙들고 마냥 즐겁기만 하다. 얼마나 덥고 힘들었으면 저리 윗통들을 훌훌 다 벗어던졌을까? 문득 옛 어르신들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몸이 엄청 고단할 땐 막걸리 한 사발 주욱 들이키고서 그 술기운에 나머지 일을 다 끝내곤 했었지.." ~~~~~~~~~~~~~~~~~~~~~~~~~~~~~~~ 김홍도(金弘道)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다.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나이 7, 8 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은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직장의 상하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는 1791년,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했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平)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에 대한 포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이는 그가 이유방의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으며 그림이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것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홍도는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에 고졸한 아취가 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멋과 문기(文氣)가 번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다. 이는 중인 신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만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1795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러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는데,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퍼져 있던 도석신앙과 관계가 깊다.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선이 특징인 그의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후기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여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등 그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씨름, 무동, 윷놀이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된 일상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그의 풍속화에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으며,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둥글넓적한 우리 서민의 얼굴이 한국적인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인문(李寅文),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다. - 두산백과 - 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