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4 .23 미국의 통상요구)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6년 7월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일을 빌미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였고,
1871년 주청 특명전권공사 로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그들은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4월 23일 미국 함대가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했고,
이 격전에서 조선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미국은 조선이 교섭에 응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군사행동을 감행하려던 미국 측은 무모함을 깨닫고
5월 16일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결과 조선의 쇄국정책 및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덕진진 공조루, 사적 제226호,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 남장포대, 사적 제226호,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 덕진돈대, 사적 제226호,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 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미국 함대는 그해 4월 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월 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월 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월 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 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용두돈대(광성보) 강화 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요새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광성보
쌍충비(광성보) 신미양요 때 미국에 맞서 싸운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린 비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덕진진 경고비, 사적 제226호,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