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st Musorgsky (1839~1881) A Night of the Mountain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A Night of the Mountain
(Modest Musorgsky, 1839~1881)
A Night of the Mountain
(Modest Musorgsky, 1839~1881)
A Night of the Mountain
이곡은 시원하다기보다 으시시한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꼭 여름철에 TV에서 납량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에도 요괴들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음악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음악이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이라는 곡이다.
유럽과 러시아에서는 6월 24일이 우리 나라의 하지에 해당하는
"성 요한제"로 러시아에서는 그날 밤 산에서 요괴들이 내려와
온갖 장난을 한다고 한다.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은
그것을 묘사한 음악이다.
악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하 정령들의 소동. 먼저 어둠의 혼령이 나타나고 이어
체르노보크(암흑의 신)가 등장한다.
혼령들이 체르노보크에 대한 찬미와 어둠의 제전.
그리고 성대한 지옥의 향연,
그 시끄러운 잔치가 한창일 때 들려 오는
마을 교회의 종소리. 어둠의 혼령과 체르노보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면 어느새 동이 튼다.”
월트 디즈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영화 “환타지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민둥산의 하룻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보면 더욱 실감나게 이 곡을 감상할 수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은
원래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젊은이의 꿈>이라는 음악을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작곡자 사후에 관현악으로 완성한 것이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민둥산의 하룻밤>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무소르그스키 사후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며,
1886년 10월 27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교향악 연주회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 속에서
이 곡은 3막 1장과 2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데,
오페라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꿈속에 나타난 악마의 향연을 묘사하고 있다.
<젊은이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던 이 곡이
나중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의해 편곡되면서
<민둥산의 하룻밤>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은
본래 이 작품이 무소르그스키가 1867년에 완성한 관현악곡
<민둥산의 성 요한 축일 전야>에서 유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남부 키예프에 있는 트라고라프라는 산 위에서는
매년 6월 24일에 성 요한의 제사를 지내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전날 밤에 악마들의 잔치가 벌어진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전설에 따라
성 요한 축일 전야의 모습을 묘사한 곡이 바로
<민둥산의 성 요한 축일 전야>이다.
무소르크스키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밤의 영혼들이 지하에서 아우성치며 어둠의 영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탄이 나타나 악마를 숭배하는 의식이 벌어져
절정에 달할 무렵 멀리서 작은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혼령들이 사라지면서 아침 하늘이 밝아온다.”
무소르그스키는 <민둥산의 축일 전야>를
발라키레프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작곡했으나
발라키레프는 이 작품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결국 얼마 동안 이 작품은 출판되지도 못한 채
성 페테르부르크의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1968년 모스크바의 출판사인 "무지카"를 통해 출판되었다.
그래서 현재 무소르그스키의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가 직접 오케스트레이션을 붙인
원전판인 <민둥산의 축일 전야>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의해 편곡된 <민둥산의 하룻밤>의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대개는 거칠고 과격한 원전판보다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의해 잘 다듬어진
<민둥산의 하룻밤>이 더욱 자주 연주되고 있다.
A Night of the Mountain
(Modest Musorgsky, 1839~1881)
Modest Musorgsky (1839~1881) A Night of the Mountain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후반에 러시아에서는
국민 음악 운동이 일어났다.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을 건설하려는 기운이 감돌았는데,
그 운동의 중심은 이른바 5인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소르그스키도 그 주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7세 때에 벌써 리스트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군 병원에서 군의관이었던 보로딘과 알게 되었고
큐이, 발라키레프 등과도 교우를 맺었는데, 그 후로 그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2세 때 그는 군에서 떠나 음악에 전념하였는데,
1860년에 작곡한 오케스트라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친구들의 충고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 음악은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다.
1863년 그는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는데,
2년 동안의 생활이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 활동이 원숙해졌을 때에 생활고로 인해
다시금 체신부의 관리가 되었다.
한 때 그는 고민한 나머지 알콜에 중독되었으나
전지 요양을 통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다시 그는 궁내성 산림과에 근무하면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쓰기 시작하였다.
1871년 여름,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죽었는데,
그 친구가 남긴 작품의 전람회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피아노 곡집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공연된 이후 그는 옛 친구들로부터 떠나
다른 주석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는 관리 생활을 중지하였고 경제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881년 2월, 돌연히 발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더 악화되어 작고하였다.
그는 5인조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였다.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음악적인 천분과
러시아 민요의 표현 요소 등을 소재로 하여
가장 우리들과 친숙하고 진실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예술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란 음악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의 연주는 감정을 높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담화와 억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유렵의 고전 음악의 전통에 반항하여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대표작인데,
거기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비록 그의 작곡 기교는 유치했지만
샘과 같이 솟아 나는 즉흥적인 착상과
드라마틱한 연출은 비범하며 비할 바 없는 미묘한 감각을
간결한 수단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생각한 바의 줄거리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개시키는 재능이
부족한 것이 그의 약점이다.
그의 음악은 심도 깊은 우울함과 격렬한 정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하자면 그는 근대 러시아가 낳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고 야성적인 현실주의 작곡가로
천품을 나타낸 작곡가라 할 수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쿠치카(억센 무리)’란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포함한
여러 관현악곡과 피아노곡들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은 <전람회의 그림>이다.
이것은 본래 피아노곡이지만, 프랑스의 인상파 작곡가인 라벨이
그림 같은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 더 많이 연주되고 있다
185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걸쳐 활약한 러시아의 작곡가·
평론가 그룹. 오인조(五人組)라고도 한다.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등 5인조 작곡가와 음악·문예평론가인 V.스타소프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독일오페라를 비롯한
서유럽음악이 압도적이던 당시 러시아 음악계에
러시아 국민음악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혁신적 세력으로 대두,
러시아 음악사상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대표작): 모음곡<전람회의 그림>, 가곡<벼룩의 노래>,
교향시<민둥산의 하루>, 오페라<보리수 고두노프>
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