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col Paganini 1782∼1840
Violin Concerto No.1 in D major, Op.6/MS.21
파가니니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제 1악장 Allegro maestoso
관현악 전주에 이어 바이올린 독주가
상쾌하게 제 1 주제를 연주하며 등장하여
선명한 기교로 강한 인상을 심어 주고 나면
매끄럽고 달콤하게 노래하는 제 2 주제가 나타난다.
제 1 악장은 몇 개의 황홀한 선율이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며 듣는이를 깊이 사로 잡는다.
제 2악장 Adagio Espressivo
극적인 관현악으로 시작하여 표정 풍부한 독주가
부드러움속에 열정을 담고 노래한다.
제 3악장 Rondo ( Allegro Spritoso)
론도는 파가니니가 고안한 독특한 스타카토 주법의 주제를
경쾌하게 전개시키는 부분이 유명하다.
당시 사람들은 그 스타카토 주법에 깊이 매료 되었다고 한다
기후가 만든 최고의 바이올린
바이올린 협주곡 제 1 번
바이올린의 귀재 파가니니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6곡 정도 되었으나,
인쇄된 곡은 그 중 2곡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 바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다.
기교적인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화려하고
비르투오적이나 화음이나 형식에 있어서는
간단하고 형식적이다.
1811년에 파가니니가 29세가 되던 해 완성되었으며,
초연은 파가니니 자신의 연주로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1악장은 D장조 4분의 4박자로 소나타 형식이며,
장대하지만 화려하고 변화가 가득해 듣는 사람에게
흥미로움을 전해주는 악장이다.
리드미컬하고 상쾌한 주제에 이은 행진곡풍의 전개부,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풍 활약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노래와 연결되는 재현부는
화사한 바이올린의 기교를 충분히 구사할 수 있는
웅대하고 극적인 곡이며,
단독 연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 기교가 담긴
'바이올린 협주곡 제 1 번'은 과연 이탈리아 작곡가 답게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을
아낌없이 몇 개의 주제로 쓰고 있다.
그 서정적인 달콤함이 출중한 기교 속에
극적으로 고양(高揚)되는 부분은 파가니니만의 솜씨이다
파가니니는 자기가 직접 연주하기 위해
6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썻으나
오늘날 흔히 연주되는 작품은
제 1 번과 제 2 번 B 단조의 두 곡이며, 이밖에
제 4 번 D 단조 와 제 5번 A 단조를
가끔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제 1 번과 제 2 번의 두곡만 들으면
나머지곡은 듣지 않아도 된다.
이 두곡과 전 24곡으로 구성된"24개의 기상곡"
(24 Cappricci per violino solo op.1)에
파가니니의 전모(全貌)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 포레버 한강)
Niccol Paganini 1782∼1840
언젠가 파가니니는 바이올린 연주중에 한 개의 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그대로 연주를 계속했는데
연주하고 있는 중에 다음 줄이 끊어지고,
세 번째 줄이 끊어지고, 마지막줄도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바이올린은 크게 울리고 있었다.
파가니니가 아무리 명인이라고 하더라도,
줄이 모두 끊어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었는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때로는 그와 같은 곡예적인 연주로 청중의 갈채를 얻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솜씨라고 여겨지지 않는 초월적인 테크닉이
촛불의 조명에 의해서 떠오르는 악마적인 풍모가 함께 어울려,
무대에서 연주할 때의 파가니니는 소름이 끼쳐
바이올린의 마왕이란 칭호를 받았다.
당시 미신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은
파가니니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있다는 소문으로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 공포감이 얼마나 컸는지는 파가니니가 죽은뒤에
그 유해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화로 알 수 있다.
그는 1840년의 5월 27일에 남 프랑스의 니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가 고향인 제노바에 운반되었는데 제노바 사람들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면 악마의 재앙이 따른다고 생각하여
인수를 거절해 버렸다.
그래서 유해는 다시 니스로 되보내졌는데
거기서도 역시 거절되어 마지막에는 겨우 지중해의 고도에
그 안식의 땅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 기능에 뛰어난다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지만
너무나 완전 무결함을 가지면 인간은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좋은 예가 바로 파가니니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가니니는 자기가 연주하기 위한 6곡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수많은 바이올린 독주용의 소품을 작곡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널리 연주되는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이다.
이 협주곡은 파가니니가 가장 사랑한 작품으로
작곡된 것은 파가니니의 나이 29세 때인 1811년이고
파가니니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곡은 파가니니가 가진 모든 연주 기교를 담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갖가지 어려운 기교가 담겨있다.
전악장에 걸쳐서 아름다운 선율이 있고
그 중에서 제2악장은 전곡중의 백미로,
정열을 숨긴 서정적인 멜로디가 감동적이다.
Nicolo Paganini (1782-1840)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제노바 출생.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나중에 제노바의 극장 바이올리니스트겸 지휘자인
G. 세르베토와 산 로렌초 대성당의 악장 G. 코스타 등에게
사사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교회에서 연주하였으나
1793년 첫 공개연주회에서 성공하자,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A. 롤라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G.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웠다.
1799년부터 북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등
광범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1804년 제노바로 돌아와 이듬해 연주활동을 재개,
그해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E.B. 바키오키의 초대로
루카에 가서 궁정오페라지휘자로서 3년간 머물렀다.
1813년 밀라노로 가서 주로 이탈리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으나, 28년부터 국외 순회연주를 시도하여
빈·베를린·파리·런던 등지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파가니니의 연주법은 그 흐름을 직접 잇는 유파가 없어
그 자신의 일대로 소멸하였다.
제자는 단 한 사람 시볼리를 가르쳤을 뿐이었으며,
시볼리에게도 연주법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잘 사용한 기법은 플라졸레토, 왼손의 피치카토와
스코르다투라 등이며,
그 밖에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분리 사용 등
화려하고 곡예적인 연주를 창조하였다.
그 기술적 확충에 따른 소산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를 비롯한
다수의 소품 및 협주곡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은 바이올린곡뿐이며,
모두 어려운 기교와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강렬한 표현성은 낭만주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Salvatore Accardo (살바토레 아카르도, 1941~)
파가니니가 쓰던 바이올린을 갖고 있는
아카르도(Salvatore Accardo)는
1941년 나폴리 태생으로
1958년 제1회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 우승자이며
파가니니 협주곡 전곡(DG)을 녹음한 바 있습니다
13세 때 리사이틀로 데뷔한 그는 1956년 15세의 나이로
제네바 콩쿨에서 우승한 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6번을 초연하였으며
파가니니의 재래 라는 찬사와 함께 초인적인 기술을 과시하였다.
나폴리 음악원에서 루이지 담브로지로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뒤
다시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이본느 아스투르크에게
최종적으로 연마했다.
아스투르크는 루마니아의 거장 에네스쿠의 제자로서
아카르도의 바이올린주법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레파토리는 바흐 이전부터 현대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지만, 역시 아카르도 하면 파가니니입니다.
최근에는 현악 4중주단도 조직해 가극왕 베르디의
하나밖에 없는 현악 4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자료출처 : 포레버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