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s Le Ciel De Paris / Edith Piaf
(파리의 하늘 아래)
프랑스 샹송계의 신화적 존재
에디뜨 삐아프 (Edith Piaf) 이야기
에디뜨 삐아프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시련과 아픔을 안았다.
세계 1차 대전 중 추운 겨울, 파리의 빈민가에서
떠돌이 가수인 어머니가
무료 자선병원을 찾아 헤매다가 길에서 낳았다.
그리고 생후 2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노래를 아주 잘 한 그녀는
15세 때 할머니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로주점에서 노래하던 시절, 바텐더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버림받고 말았다.
어린 아이 때문에 직업을 구할 수 없어
힘들게 살고 있던 추운 겨울 어느 날,
아이가 몸이 아파 사경을 헤매었다.
그녀가 그 당시 사랑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파는 길 뿐이었다.
그녀는 절박감에 잠겨 입술을 굳게 악물고,
싸락눈이 흩날리는 상제리제 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며 하루 저녁 뭇 남자들에게
돈을 받고 몸을 팔았다.
그녀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내 꿈을 이룰 수 없다.
아이도 살릴 수 없고 가수 자격도 잃고 만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피눈물을 삼켰다.
그 날 이후, 에디뜨 삐아프는 깊은 슬픔과
고뇌와 절망을 뚫고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담긴
영혼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참새(삐아프)'를 뜻하는 그녀의 이름과 같이
작고 가냘픈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한을 토해내는 듯한 애끓는 발라드 노래는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그대로 묻어 나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금을 울려 주었다.
어느 음악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아픔이 담긴
그녀의 아름다운 샹송을 들은
실존주의의 대철학자인 사르트르(Sartre)는
아낌없는 격찬을 보냈다.
그녀는 샹송계의 불멸의 성좌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 고 말했듯이,
사람도 많은 삶의 상처(어려움)를 입다 보면,
자생력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에디뜨 삐아프는 47년을 사는 동안 세 번 결혼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
한 마디로, 늘 남자가 있었다.
그런 에디뜨가, 말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연애를 많이 했지만,
단 한 사람 밖에 사랑하지 않았다. 마르셀 세르당 밖에...”
에디트 피아프가 1950년에 부른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는
그녀가 사랑했던 유럽 헤비급 복싱 챔피언인
마르셀 세르당에게 바쳤던 사랑의 시이다.
마르셀 세르당은 때리고 얻어맞으며
사각의 링을 맴도는 '권투선수'였다.
마르셀이 시합을 보러 와 달라고 했을 때,
에디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서워서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마르셀은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이 노래할 때...,
나도 두렵지만 들으러 갑니다.”
마르셀은 그날 밤, 에디뜨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승리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결코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않았다.
에디뜨 삐아프가 뉴욕에서 공연을 하던 날,
마르셀은 프랑스에서 시합이 있었다.
“마르셀,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나도 당신이 보고 싶소.
시합이 끝나는 대로 공연장으로 달려가리다.”
마르셀은 시합을 마치고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대서양 한가운데에 추락한다.
그날 밤, 창백한 얼굴로 무대에 오른 에디뜨 삐아프는...
관중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 밤은...마르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하겠습니다.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위해서...,”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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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인 복서 마르셀 세르당과 함께한 Edith Plaf
(1940년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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