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統營) 충렬사
천재 詩人 백석(白石)과 통영(統營)
시인 백석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을
詩로 남겨 통영을 더욱 아름답게 예찬하였습니다.
작은 도시 통영은 그래서 더 매력적입니다.
파라솔 밑 그늘은 팔월의 더위를 다 내쫓지 못해
훠이훠이 손으로 비켜나라고 물리치며 간 곳은
맑은 샘이 투명한 하늘을 물속으로 불러
두 개의 하늘이 마주보며 미소짓는
'정당샘'이 있는 명정동입니다 .
7월이 끝나던 날 여황산 자락을
가마처럼 타고 내려 와 터 잡은 '세병관'을
돌아 보고 내친김에 명정골까지 걸음하여
반나절의 시간을 기웃대다가 돌아간 곳입니다
그날 충렬사 앞 작은 공터인 정자옆에서
우연히 만난 백석의 시비,
가슴 아리게 하는 통영 2' 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시인 백석은 첫눈에 반한 통영 천희 박경련을 찾아
명정골로 세번이나 걸음하여
가슴 시린 애틋한 시를 남겼습니다.
백석의 가슴에 난으로 피어나
동그마니 들어앉은 통영 천희 박경련
어쩌면 그녀도 명정골의 '정당샘터'로 나가
빨래하고 물길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지분거리기도 했을까요?
열여덟 꽃같던 박경련은 백석의 세숫물에서 조차
그림되어 둥둥 떠다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운 그녀를 보려고 천리길을 달려와서
남도 끝자락 통영의 낡은 옛사당 돌계단에 주저앉아
쓸쓸하게 시를 지었을 백석을 생각 해 보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중략
시인 백석이 통영을 다녀 간 사연이 절절하고
애틋한 명정골 이곳에서 시작되는 퇴영이야~
길을 따라 조용히 문학기행을 해보리라 생각했던
7월의 마지막 하루.
그날은 마음에서 갈수록 또렷해져
기어코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와 봅니다.
백석은 박경련을 고고한 난'으로 이름지어
자신의 시속에 심었고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되었습니다 .
토영이야~ 길의 여정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명정골에서 시인 백석과 통영 천희 박경련을
기억 해보는 의미는 특별한 그리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명정골은 사방으로 대밭골 망짝골 도독골`
`약새미골` 등의 작은 골짜기를 아우르고 있어
그 골짜기 마다에는 서문고랑 숨은고랑 동사고랑
서답고랑 까죽고랑 등의 실개천이 흐르는 등
수량이 매우 풍족한 곳이었다"
약새미 (명정동 충렬사를 마주하는 안산아래 우물)
논새미 (명정 서호동의 경계지역 옛변전소뒤 우물)
돌새미 (해방다리 옆 우물) 등의 물이 내를 이루어
가죽고랑이라 했으며 그 위로 다리를 놓아
(해방다리) 서호동 바다로 흘러들었다.
(김일룡 향토역사관장)
(통영충렬사 창건시 명정明井 조성 유추에서 옮김)
한국을 대표하는 해금시인
(월북한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분류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939년에 만주로 갔다가...)
오늘은 백석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야기와
명정골을 잠깐 소개 해 보겠습니다.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이며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22살에<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4년후 첫 시집 <사슴>을 출간한 후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은 뒤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 1938년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이듬해 만주로 이주하게 됩니다.
얼핏 보면 백석은 남쪽의 끝자락
통영과의 인연이 뜻밖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 그가 즐겨 쓴 시편들은 대개가
북쪽의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며
진한 토속성을 담고 있기에
'통영'이 비집고 들어 서기로는
생경 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운명적인
통영과의 만남이 실제로
명정골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
이화여고생 통영의 박경련
백석의 첫사랑 <통영의 란, 박경련>
이루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이야기거리가
풍성하게 만들어 지기도 하지요.
백석이 자야를 만나기 전,
첫눈에 반한 여인으로 인해 아피야했던 고통을
숨겨 놓은 통영의 서정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백석은 평북 정주태생으로
시인 김소월을 동경하여 시인의 길을 택했고
슬픈 사랑을 긴 인생길의 여정처럼 노래하며
채워 갔습니다 .백석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일보사에서 여성지의 편집 일을 하던 어느 날
1936년3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는데
백석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통영출신 친구 신현중이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경남 통영출신의
박경련을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이렇게 그들의 운명은 시작 되었으며
백석은 통영으로 내려가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박경련을 아내로 달라며 정식으로 청혼하게 되었고
통영을 세번 방문 하게 됩니다.
그러자 박경련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친오빠(박경련의 외삼촌) 서상호에게 부탁하여
백석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당시 통영출신 거물급 인사였던 서상호는
독립운동가 이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서상호는 당시에 조선일보 사회부기자였던
신현중에게 백석의 뒷조사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며칠후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선생님 ! :
그래 뭘 좀 알아봤는가 ?
예 !
그래 백석이 어떤 사람인가 ?
예 !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여성지의 편집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이며 그의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란 소문도 있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서상호는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저 ~ 선생님 !
왜 그런가 ?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
신랑감으로 저는 어떻습니까 ?
뭐 ! 어~그래 ! 허허허허 그거 좋지 !
하지만 자넨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
아~아닙니다 ! 벌써 오래 전에 정리했습니다 !
으~흠~; 그래 ! 그럼 생각해보세 !
이렇게 해서 신현중과 박경련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그 해 4월
통영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1937년 4월에는 백석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백석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청혼했던 처녀
박경련이 결혼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백석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현중과...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버리자
상처를 받은 백석..
그 후 백석의 가슴에는 통영의 여인이
통한의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석은 박경련의 고향인 통영마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사랑을 노래하며
그는 남해의 끝자락을 두 차례 더 여행을 하며
통영. 고성가도,삼천포 등의 시를 남겼습니다.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한
'통영'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 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가 나는 비가 나렸다"
이 시는 1935년 6월경에 씌어졌다고 보여지며
이어 백석은 두번째 통영행을 하게됩니다.
1936년 1월경으로 시 속에 등장하는
'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
천희 : 바닷가에서 시집 안 간 여자를
통영 거제 지역에서 천희 혹은 처이라고 불렀습니다.
(# 담하 : 어릴적 할머니들은 처녀들을 보고
"처니야"하고 부르던 기억이 있슴 #)
또한 천희(千姬)는 남자를 잡아먹는(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속뜻도 있습니다.
[처이..라고 발음할 때 콧소리로 해야..
처녀..라는 뜻이 됨 = 펌글자 첨글]
미역오리 : 미역줄기.
소라방등 : 소라의 껍질로 만들어 방에서 켜는 등잔.
자신을 잡아먹은 천희는 바로 박경련을 지칭하는
원망의 정서를 깔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서로가 어색하고 서먹서먹하였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 사이였던 신현중은
박경련과 혼인 후 백석을 가회동 집에
처음으로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신현중의 부인이 된 박경련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 나는 그 때 깜짝 놀랐어요.
현중씨 뒤에 누가 들어오는데
백석씨라는 것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백석씨도 어색한지 방문 앞에서 얼굴이 빨개가지고
우물쭈물하고 들어오지 못 하고 있었어요.
백석씨는 부끄러워 숨는 것 같았어요.
나는 옆으로 빠져 나와 바로 옆집
외삼촌 집으로 갔어요.
나는 그 날밤 외삼촌 집에 있었어요.
그 다음 날 현중씨는 외삼촌인 죽사에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외삼촌은 그런 법이 어디 있나고 막 야단을 치고
현중씨는 상당한 초달을 받았어요.
그 이후 백석씨가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날 이후 현중씨는 얼마 있지 않아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받아
나와 함께 경남 통영에 내려가서 살았어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바로 밑에 명정동 집 말입니다.
그 때는 벌써 애도 생기고 농사일에도 신경을 쓰고
바닷가가 살기가 좋았어요."..옮긴 글
사랑했던 여인을 친구에게 빼앗기고도
말없이 바라만 봐야했던 안타까운 백석에게 어쩌면
통영의 그녀는 사랑의 영감을 詩로 태어나게 해 준
최고의 선물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두번째 '통영'에서는 구체적인 지명
"명정골" (현재의 통영시 명정동)이 나옵니다.
명정골은 '명정(明井)'이라는 샘이 있는 마을로
'명(明)은 '일(日)과 '월(月)을 합쳐서
붙여진 글입니다
2011년8월 어느 날, 충렬사 앞길에는
백석이 못잊어 했던 여인만큼이나
고운 그 나이 또래의 처녀둘이 서 있습니다.
백석은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
충렬사 돌계단에 주저 앉아
명정골 처이 [處女] 박경련을 하염없이
그리워 했을것입니다 충렬사 계단 위에 서 있는
젊은 그는 오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입니다.
여황로 길 건너에는 명정골의 딸들이
오구작작 우물을 긷던 정당샘이 오늘도 누군가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물을 긷기 시작한지 삼백마흔한(341)해가
물같이 흘렀다고 합니다.
통영시 명정동 194번지의 '정당샘 '
버스를 타고 오다가 앞자리에 앉은 여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명정동에 가면
맑은 우물이 실제로 있을까요?하고 물었더니
그 동네 가서 물어보세요 아마 있을겁니다..
잘 모르긴 해도..우물이 있을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실제 통영 출신 작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명정샘'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이곳 정당샘은 햇살을 지붕없이 그대로 받아야
맑은 물이며 지붕을 씌어 보니 물빛이 흐려져서
다시 걷어 내고 말았다고 표지판에 적고 있습니다.
햇살이 직접 투과해야만
맑은 정담샘의 진가가 발휘된다고 합니다.
명정골의 천희들은 정당샘터 옆으로 난 빨래터에
쪼그리고 모여 앉아 빨래 방망이질 탁탁거리며
사분칠하여 뽀득뽀득 문질러 사분물을 말개지도록
행구었을겁니다.
이제는 아무도 빨래하지 않는 빨래터
무지 심심해 보입니다.
(# 담하 : 어릴적에 비누를
사분이라고 하였던 기억이 있음)
물속을 들여 다 보니 오랫도록 쓰지 않아
고인물에 푸른 이끼가 소복하니 끼여있지만
맑은 하늘을 들여 다 놓은 정당샘은
이름만큼 맑았습니다.
여황산 물줄기가 명정골로 흘러들어
정당샘을 이루었고.
統 營
白石은 서럽게 野馬골 밑에 蘭을 심었다.
사랑하지 못하니 生을 다해 사랑하였네라.
詩人이 잊지 못하는 것은 明井골의 샘이었으리.
여황산 배곱 아래 펼쳐진 陰部의 샘은 마르지 않고...
중략..................(옮김)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통영기행 2 / 백석시비(白石 詩碑)
백석시비(白石 詩碑)
충렬사 계단을 올라 안내소에서
시인 백석이 못잊어한 여인 박경련이 살았다는
집이 어디냐고 묻자 직접 안내소에서 나온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어기 '기와집이라며
알려 주었지만 하늘공간이넓고 무성한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눈앞에서 남실거려
가르쳐 준 방향을 곧장 까 먹고 말았습니다.
이곳 재단법인 통영충렬사 박형균 이사장과
박경련은 가까운 친척이라하여
만나보고 싶다고 하니
먼길 가셨다고 하여 아쉽습니다 .
'통영의 란' 박경련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 볼 수도 있었는데...
박경련이 살았던; 명정골 396호 기와집
지금은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동백나무가 숲을 이룬 낡은 사당 충렬사에서.
백석은 명정골 먼당에도 올라 보았을까요?
[먼당=꼭대기/정상부분]
둑지먼당을 내려 와 창동길을 돌아봅니다 .
여자장사로 유명했다는 야마골(술집의 역사)
이야기와 통영을 흥겹고 걸쭉하게 이야기로
들려 주시던 한산도 할아버지의 끝나지 않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헤어졌습니다 .창동골목길 내려 오다 만난
1945년생 이문당 서점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
이제 통영을 떠납니다.
(참고자료)
(이동순의 백석선집 , 조선일보 ,경남 문학지대)
[작성자 / 빨강머리앤]
Sicilian Romance - Ernesto Cortaz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