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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 겨울 47일동안) (전쟁의 징조들)

담하(淡霞) 2019. 6. 16. 15:44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겨울 47일동안 이땅에서 벌어졌던 전쟁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력자들 탓에
고생한 백성들 이야기임.
(박종인 문화 전문기자 기사 발췌)
(개요)
1636년 한겨울 47일간 벌어진 병자호란 
최고 지도자 인조와 인조반정 공신들이 
북방에서 힘을 키운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자.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자기를 멸시한 조선정복을 준비
남한산성에  쫒겨 들어간 지도자들이 적앞에서도 
명나라 황제를 위하여  춤을추며 明나라를 경배함
功臣 출신 사령관 김류는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고
강화도 수비대장 김경징은 내 아버지 군수품이라며
군사들을 맨 주먹으로 출정 시킴....
1.  청을 오랑캐라 배척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전쟁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대신 황제국 明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明나라 인구는 1억명 정도였다. 반면
만주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을 합쳐서100만명 정도 였다
그무렵 걸출한 추장 누루하치가 
여진족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후 왕이된 광해군은 국가 생존을 위해 
이 새로운 세력에 친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明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인조는 당연히 친명(親明) 이었고
친명(親明)은 즉 배청(排淸) 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1626년아버지에 이어 왕이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이 明나라의 잔당인 모문룡울 보호하고 
淸나라와의 교역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강화도 까지 도망 갔다온 인조정권은 
배청(排淸)정책을 강화했다
문신(文臣)들은 전쟁 불사를 외쳤고 
무신(武臣)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인조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반정공신인 문신(文臣)들의 말을 따라야 했다
2.  전쟁의 징조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입국했다
"후금이 황제국"이라는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은 경악했다
용골대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1636년 2.월26일 사신일행이 창덕궁을 찾았는데 푸대접하였다
전쟁 냄새를 맡은 조선 정부는 3월1일 국경지역에
오랑캐와 절교하니 방어태세를 갖추라고 왕명을 내렸다
3월7일 왕명문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원대 복귀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1636년 4월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에 
조선사신 두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국서를 들려 보냈다 
조선 정부는 국서를 가지고 온 두사람을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 라며 귀양을 보내 버렸다
5월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국토가 수천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수  것인가 
6월17일 또 내린다
우리는 明의 동쪽 신하국(臣下國)으로 
明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1636년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25일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東征)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것인데 
산성(山城)을 가지고 나를 막을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것은 강화도지만 ..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 유신(儒臣)들이 붓으로 우리를 막을수 있겠는가?
1636년 12월 청태종이 말하는 그대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졌다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10여개성은 그대로 놔두고 
청군은 순식간에 서을로 진입했다
청태종 예언대로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그 속도에 눌려 숭례문 대신 시체(屍體)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