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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통한 사생관(死生觀)과 내세관(來世觀) (3. 불교 4. 기독교) Via Dolorosa

담하(淡霞) 2019. 6. 18. 22:09

종교를 통한 사생관(死生觀)과 내세관(來世觀) 
[3.불교(佛敎).  4.기독교(基督敎)]

3. 불교(佛敎)
힌두교하면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종교이지만
인도라는 나라 이름이 '힌두'와 같은 어원(語源)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케 한다.
인더스문명과 함께 기원전 2,500년경에 발생하여 후에
바라문교와 융합하고 불교를 파생시킨 인도의 토착종교로서
4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인도 10억 인구의 83%가 이를 신봉하고,
네팔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이다.
"마치 사람이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몸속에 살고 있는 아트만도 
낡은 몸뚱이를 벗어 버리고 다른 새 몸뚱이로 옮겨 가는 것이다." 
"풀벌레가 풀잎 끝에 다다르면 다른 풀잎을 잡고 건너가듯이 
이 아트만도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육신을 벗어 버리고 
다른 육신으로 건너간다.
이와 같은 인도의 고대 경전에서 힌두교의 일관된 정신과 
불교 윤회사상의 원류를 본다. 사람의 신분을 이른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사성계급(四姓階級)으로 나누어
철저하고도 가혹한 영구불변의 차등을 두고 있지만
그들은 비록 자기가 하층 천민계급으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보라고 믿기에 불만 없이 이를 감수한다.
동시에 현세에서 선업을 쌓아 
내세에는 상층계급으로 태어나도록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윤회를 거듭하는 영겁(永劫) 속의 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어서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삶은 삶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요,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해탈이다.
4. 기독교(基督敎)

    
         Via Dolorosa / Sandi Patty
           (슬픔의 길)
기원전 4세기 아테네법정에서 피할 수도 있었던 처형을 
스스로 자초하여 태연히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는
인생이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
기독교에 들어와 정통교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장 25. 26절)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요 이처럼 영생과 부활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다.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썩어 사라지지만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하나님 곁으로 보내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또한 우주공간에 오직 한 분인 唯一神 여호와 하나님이외의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조상의 영혼을 
죄 많은 세상에 초대할 이유도 없을는 지 모른다.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내려오는(再臨) 날,
이 세상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는 그 앞에서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구원을 받는데
산자는 산대로, 죽은 자는 부활해서 들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것이 곧 재림이요 부활이요 휴거(携擧)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좌를 사(赦)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
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