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in Bb Minor, Op.23

담하(淡霞) 2020. 4. 18. 09:06
Tchaikovsky.( 1840∼1893 ) Piano Concerto No.1 in Bb Minor, Op.23 피아노 : 손열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1악장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 제2악장 Andante simplice(안단티노 셈플리체) 제3악장 Allegro con fuoco (알레그로 콘 푸코)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 Pyotr Il'ich)는 일생동안 3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했다. 1875년에 op23의 1번, 1880년에 op44의 2번(G장조), 그리고 op75의 E플랫장조의 세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1893년에 작곡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이라고 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1번이며 다른 두 곡의 협주곡은 녹음이나 연주되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슈만이나 쇼팽, 브람스의 협주곡들은 비록 그 수는 적지만 그 수준이 매우 높아 연주되는 기회도 매우 많았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은 대중적인 인지도에 있어서 앞의 협주곡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정말 대중적인 의미에서는 1악장의 도입부만이 인지도가 높다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4대의 호른으로 시작하는 포르티시모의 충격적인 느낌, 그리고 러시아의 토속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서주 주제의 친근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사실 이 서주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매우 개성적이고 완성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악장이 다소 산만한 것은 논외로 하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도입부가 충격적인 것이 많은데 - 리스트, 슈만, 차이코프스키,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들을 생각해 보면 -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화려한 시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다. 아마 이전에 베토벤의 5번 협주곡이 화려한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된 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 작곡과 초연 ] 이 곡이 작곡된 것은 1874년 12월 무렵이다. 이 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비교적 조용했던 시절로, 1월에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고, 6월부터 3개월정도 오페라인 '대장장이 바쿨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당분간 창작활동을 하지 않던 차이코프스키는 12월 부터 약 1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이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하였으나, 초연은 의외로 1년 가까이나 지난 1875년 10월 25일 보스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얽힌 일화는 영화나 여러 문헌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당시 모스크바음악원 교장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였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1835-1881)과의 불화에 의한 것이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었던 안톤 루빈시타인(1829-1894)의 동생으로형 못지 않은 상당히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곡을 완성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협주곡인 이 곡의 피아노 파트에 조언을 듣기 위해 12월 24일 밤에 루빈 시타인과 프베르트(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를 초청하여 이 곡을 직접 연주하여 들려 주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 파트의 완성도와 곡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을 기대했었지만 루빈시타인은 그 자리에서 혹독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이 부분은 동석했던 프베르트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1877년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차이코프스키가 이 때 받은 심적인 충격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있다 '나의 피아노협주곡은 연주가 불가능한 듯이 보였으며, 쓰레기 같은 것이었다. 곡을 구성하는 패시지들은 어색하고 서투른 것이어서 구제불능이었다. 작품 자체가 좋지못하고 천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사보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 협주곡은 두 세 페이지만을 건질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다시 써야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격분한 차이코프스키는 방을 뛰쳐나갔고 당황한 루빈시타인은 뒤따라 나가서 몇몇 부분을 수정하면 자신이 연주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 하나의 음표도 고칠 수 없다'고 고집을 세웠으며, 당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이 곡의 초연을 의뢰하였다.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살펴보고 매우 만족해 했으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보스턴에서 가진 초연은 뷜로의 확신대로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뷜로는 이 사실을 전보를 통해 모스크바에 있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알렸다 (모스크바와 보스턴 사이의 최초의 전보가 바로 이것이라는 후문도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루빈시타인이 지휘를 맡아 1878년 3월 22일에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