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위대한 황제 표트르 대제의 일생
표트르의 출생배경
표트르 대제는 1672년, 로마노프 황실의 차르(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그의 둘째 황후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난다.
대부분 영웅들의 유년시절이 그렇듯이 표트르의 유년시절 역시 순탄치 못했다.
표트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셧기때문이다.
부친의 사망이후 황위에 오른 그의 형 표트르 역시 사망하였고,
다음 황위계승자는 병약한 형 이반5세와 표토르였다.
전대 황제 표트르가 건강하여 아들을 낳았다면 표트르 대제는 영원히 권력에서
멀어졌겠지만, 이복형 표트르는 상속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제 러시아의 차르 가문에서 남은 아들은 이반과 표트르 대제뿐이었다.
당시에는 구체적인 황위 계승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두 명의 황후가문,
즉 이반 황자를 배출한 밀로슬라브스키 가문과 표트르 대제를 배출한
나르이쉬킨 가문 가운데 승리하는 쪽이 러시아의 차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613년 로마노프 황가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귀족세력(개국공신)에서 표트르 대제를 새로운 차르로 추대했고,
표트르가 제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나르이쉬킨 가문이 정통 황위계승자로
간택 되었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흔히 표트르 대제가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등극한걸로 잘못
알고있는데,이는 엄연히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 정통 황위 계승자로
간택되었던 인물이고 정통황제의 신분에서 혁명을 통해 황권을
되찾은 인물이다)
그러나 표트르의 이복 누나인 소피아는 유능하고, 강인했으며, 또한
야심만만한 위인이었다. 그녀는 당시 모스크바를 경비하던
스트렐츠이라는 소총 부대를 선동하여 나르이쉬킨 가문을 제거하고,
동생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로 선포했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소피아공주가 선동시킨 과정을 덧붙여 설명하자면 그 방식이
너무나 비열하고 무자비하다. 스트렐츠이 병사들은 나르이쉬킨 가문
사람들이 이반 왕자를 죽였다는 선동에 흥분하여 크레믈린 궁으로 난입했고,
지휘관들을 폭행하고, 나르이쉬킨 가문과 친한 스트렐츠이 사령관인
마트베에브를 찾아 나섰다.
마트베에브는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황비 나탈리야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옆에는 어린 표트르와 이반이 잔뜩 겁을 먹고 서 있었다.
스트렐츠이 폭도들은 이반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흥분을 주체 못하고 결국 마트베에브를 끌어내 표트르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이고 말았다.
사령관까지 살해한 폭도들은 더욱 흥분하여 궁정 곳곳을 누비며
수상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피의 향연을 벌였다. 그리고 끝내는
당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표트르의 외삼촌 이반 나르이쉬킨을 잡아
잔인한 고문과 함께 난도질하여 죽였다. 만 열 살의 나이에 표트르는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표트르의 가슴 깊은곳에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었다.
차르(황제)의 예기치못한 죽음은 곧 황궁 내의 권력 투쟁은 피바람을
몰고 왔으며,어린 나이의 표트르는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소피아는 스트렐츠이의 반란을 계기로 부상하여 약 7년간 크레믈린의
주인 행세를 했다. 그녀는 당시 모스크바의 관습에서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686년부터 모든 공식 문서에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명의 공동 차르인 이반과 표트르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차르의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불안한 위치에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전쟁놀이나 하고, 배 만드는 일에 열중했던
어린 표트르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차르에 오른 표트르를 함부로
제거할 수는 없었고,더욱이 큰 혼란이 휩쓸고 간 상황에서
또 다시 차르를 폐위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찬 성격의 소피아는 어린 표트르를
너무 얕보았던 것 같다.
덕분에 표트르는 차르의 신분을 유지한 채 모스크바 인근의
황실 영지인 프레오브라젠스크 마을에서 모든 것을 잊은 양 주변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전쟁놀이에 몰두하며, 또한 외국인 촌에 들려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활기차게 자라났다. 그리고 이때 만난
외국인들을 통해 표트르는 서구 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향후 추진하게 될 수많은 국가 및 사회 개혁에 필요한 지적· 인적
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표트르는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를 흉내 내며
수도승 차림으로 음주가무를 즐기고, 예수 대신 술의 신 박쿠스를 섬기고,
여염집을 약탈하며 성직자를 두들겨 패는 등 온갖 비행과 신성모독을 자행했다.
그래서 “어떻게 명색이 황제라는 인간이 저럴 수가··”하는 손가락질을 받는 한편,
정적들에게서는 경멸과 함께 방심을 자아냈다. 사실 이런 ‘미친 짓들’은
자신을 늘 거북하게 여기던 소피아 공주의 그런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뜻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전통적 공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맛보고, 산과 들에서, 천한 무리들의 생활 속에서
더 큰 배움을 얻는 과정이기도 했다
(후에 두들겨 맞은 성직자에게 표트르가 황제의 힘을 되찾은 후에
그때 당시의 일에 대한 잘못을 구하러 빌러간 일화도 있다.)
파격적이며 관습에 구애되지 않던 표트르는 러시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를 꿈꾸었고, 마침내 서유럽 유학에 나서서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다녔다. 그는 러시아 황제의 신분을 감추고 공장과 박물관, 병원,
대학과 천문대 등을 열심히 견학하고 다녔으며,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직접 손에 망치를 들고 배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영국에 갔을 때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해군을 배우는데 온 힘을 쏟았고,
영국 해군의 명예 제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표트르는 낙후된 러시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있던
서유럽을 돌아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영혼에 깊이 새겼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나라, 내 국민,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그러려면 서구식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만 한다.”
황권 회복
표트르의 유학은 1698년, 소피아가 본국에서 쿠데타를 시도함으로써
갑작스레 중단되었다.초기에 표트르와 소피아 사이의 싸움은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대결이어서 러시아의 귀족들과 스트렐츠이 장교들도
섣불리 어느 한편에 서지 못하고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그러나 소피아는
동생인 공동 황제 이반이 병사함으로써 군부는 이미 장성한 표트르 쪽으로
군부가 돌아서고, 소피아는 명분과 동시에 군권도 잃게되었다
그래도 최후의 힘을 짜내 근위대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켰건만,
표트르가 서둘러 귀국했을 때는 이미 황제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된 뒤였다. 소피아는 수도원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나머지 역도들은 황제가 손수 목을 쳤다.
그리고 러시아를 전혀 다른 나라로 탈바꿈시키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17세기의 러시아는 서구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을 뿐 아니라
뒤졌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국교인 러시아정교는
가톨릭 또는 개신교인 서유럽의 문화적 영향을 못 마땅해 했고,
아직도 중세적 특권을 누리고 살던 귀족들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쩌다 외국인이 다녀가면 그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심문을 당하고, 그가 손댄 것은 부정을 탔다고 불태워 버리는 등,
19세기 말 조선의 쇄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꽉꽉 막혀 있던 사회가
당시의 러시아 사회였다.
표트르는 이런 뿌리 깊은 사회관습에 경악하며 그야말로 개혁을 호소했고
과감하게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는 귀족들을 만찬에 초대해 다가가서는
긴 수염을 붙잡고 가차없이 가위질을 해댔다.
귀족들은 표트르가 개혁을 호소해도 아랑곳없었다.
그래도 굳이 수염을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물렸으며,
1년이 지나자 그 세액은 새로운 함대를 건설할 만한 돈이 되었다.
그만큼 러시아 국민의식은 낙후 되있던 것 이다.
또한 동양식의 풍성한 옷을 없애고 서양식 양복을 입게 했으며,
역법 역시 유럽이 쓰던것과 같게 바꾸었다. 문자도 간소화하여
쓰기 편하게 바꾸었다. 서구문물을 거부하던 교육과는 정반대로,
귀족의 경우 외국어를 익히지 못하면 귀족 신분을 박탈 당하게 했다.
교회도 개혁하여 황제가 정점에 서는 위계적 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이런 급진적 개혁이 저항을 가져오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표트르 만의 카리스마로, 그리고 잔인할 정도의
가혹하고 철저한 형벌 제도로 거침없이 러시아를 뜯어고쳐 갔다.
황태자의 죽음
이런 개혁군주 표트르를 탐탁치 않게여기는 귀족세력들이 늘어나자,
그 선두주자에는 아들 황태자 알렉세이가 중심에 서 있었다.
아버지 표트르와 달리 유약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알렉세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닮으라며 시키는 교육 방식이
몸에 맞지 않았다.장성해서는 아버지의 정책에 대한 의문까지 생겨났다.
마침내 계속 말을 듣지 않는다면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선언이
표트르에게서 나왔다. 그 후 황태자는 쿠데타를 준비중이었고
일이 발각되자 알렉세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얼마 후 그는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국했지만,
표트르의 개혁을 시기하던 세력들과 또 다시 야합하자
표트르는 황태자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재판소에 넘겨 버렸다.
재판소는 그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표트르는 러시아 국운을 위해
결정을 내리게된다. 러시아 근대화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기위해,
반 개혁파의 우두머리였던 애지중지하던 아들 황태자 알렉세이를
잔혹한 방법으로 반 개혁파 세력 모두가 보는앞에서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다.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마저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시킨 표트르의 일편단심
개혁정신 앞에 반대세력들은 입을 다물고 굴복하고 만다. 한가지 분명했던 것은
표트르가 장례식이 끝나고 한밤중에 아들의 무덤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아들을 잔혹하게 죽인 황제에게도 저런 것이 있었나 싶었던 것만큼이나
남몰래 흘린 뜨거운 눈물이었다..
정치적 이념 차이로 아들을 잃게된, 표트르대제의 가슴에 세상은 또 한번의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스웨덴의 칼 12세를 향한 9년간의 전투 준비이다!
슬픔을 잊기위해 표트르는 개혁정책에더욱 몰두하였다
하지만 이런 모든 개혁은 가장 큰 시험대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전쟁이었다.
표트르는 먼저 남쪽으로 투르크를 공격할 생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대안은 북쪽이었다.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해야만
개혁도 계속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고, 개혁의 목표인 ‘"강대국 러시아"도
실현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폴타바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병사들이여.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때가 왔다!” 1709년 6월 27일, 어스름한 새벽.
우크라이나의 폴타바에 5만의 러시아군이 모였다.
말 위에 올라 칼을 빼들고, 병사들의 앞에서 외치는 사람은 표트르 황제였다.
그의 말처럼 러시아는 이제 물러설 데가 없었다.
눈앞의 적은 "카를12세" 가 이끄는 스웨덴군과 표트르에게 반기를 든
우크라이나 토착민들. 지금 생각으로는 어떻게 스웨덴이 감히 러시아에게?하고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스웨덴, 폴란드, 투르크 등에게
돌아가며 침략당하는 약소국 이였다.
적군은 3만으로 이쪽보다 열세였지만, 군사적 천재라는 "카롤12세"는 1700년에
나르바에서 8천의 군대로 4만의 러시아군을 짓밟아 버린 적이 있었다.
표트르는 그때부터 스웨덴을 이기기 위해 본인 일생의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의 종을 몰수해 대포로 만들었고, 귀족이든 농민이든 가리지 않고 병력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칼을 갈아온 지 약 9년, 이 전투에서 이긴다면 러시아는
새로운 강자로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패배 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 전투에서 표트르는 한가지 위대한 연설을한다.
표트르를 위해 싸울 필요는 없다.
표트르가 맡고 있는 러시아를 위해 싸워 다오.
이 나라, 이 민족의 내일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다.
우렁차게 외치는 표트르의 장검이 번쩍 빛났다.
그 장검은 단지 지휘를 위해 뽑아 든 것이 아니었다. 곧 벌어질 처절한 싸움의
제 일선에서, 적군을 베고 또 베어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 것이었다.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일반 병사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며
싸워 왔으니까. 전쟁 때만이 아니었다.
표트르는 큰 불이 나면 소방대보다 먼저 달려가서 불길을 헤치고
사람들을 구해내곤 했다. 황제의 검은 처형장에서도 휘둘러졌다.
1698년, 그는 반역한 근위대 2천 명을 참수하며 그 중 2백 명의 목을
손수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2미터가 넘는 키, 날밤을 새우며 술을 마셔도
끄떡없는 체력, 게으르고 뒤쳐진 바뀌지 않으려는 러시아 국민들을 향한
거친 채찍질도 마다하지않는 괄괄한 성미. 표트르는 러시아만이 가질 수 있는
황제였고,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모든 일에 직접, 전심전력으로 임하는 사람이었다.
표트르의 목숨은 잊어버려라.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러시아를 위하여, 그대들과 그대 가족들의 행복을 위하여, 싸우자!”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고, 얼마 후 5만의 러시아군은
쳐들어오는 적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물론 선두에는 표트르가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들은 오직 공포 때문에 복종하기도 했고,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라는 이상에 불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모두가 같았다. 지금 자신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인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다는 확신만은...
전투는 치열했다. 선두의 표트르는 총상을 입었으나 꿈쩍도 않으며
계속 싸우고, 격려하고, 최전방에 앞장서서 지휘했다
그러나 적장인 "카롤12세"는 불운했다. 그는 앞서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이 싸움의 지휘권을 두 장군에게 위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카롤12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스웨덴군은 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러시아군은 스웨덴군의 선공을 잘 막아낸 뒤 전선을 길게 펼쳐,
물러서던 스웨덴군을 포위해 버렸다.이 때 부상당한 "칼 12세"가 타고 있던 마차에
포탄이 명중했으며, 왕이 죽었다는 소문(그렇지 않았지만)은 열세에 몰린 스웨덴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었다. 렌스쾰트 장군을 비롯한 수 천 명의 포로가 잡혔고,
그들은 한창 건설 중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게 된다.
"카롤12세"는 천여 명의 병사만 데리고 몰다비아로 달아났다.
북방전쟁은 그 뒤로도 10년을 넘게 끌었다,
이번에는 해군력을 통해 발트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새로 구축된 해군은 1719년에는 영국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마침내 1714년 한코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은 스웨덴 해군을 격파하고 곧바로
핀란드를 공격한 후 육로를 통해 스웨덴 본국으로 진격했다. 1718년 카를1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프레드리크 1세는 결국 1721년 러시아와 강화를 맺으니
21년이나 지속된 대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사실상 이 싸움으로 승패는 판가름이 났다. 승리한 결과 오래 전 잃어버린
발트연안을 되찾은 러시아는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고,
표트르는 더욱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회의인 두마는 그에게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에게 영광의 기념물은 무엇보다도 폴타바 전투의 6년 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표트르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완전히 유럽식으로 건설했고,
그곳은 발트 해를 한 손에 움켜쥔 군사적 요충지인 동시에 러시아의
‘서쪽으로 열린 창’으로서 서구문물의 본격적인 유입지가 될 것이었다.
이 전쟁이후 러시아는 자신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하였고,
차르에게는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다만 이 칭호는 차르의 칭호와 병용되었고, 실제로는 차르가 더 친숙한 표현이 되었다.
아무튼 동방의 후진국으로 생각되던 러시아가 당시 유럽의 열강인 스웨덴을 격파하고
발트해의 강자가 되자 이제는 스웨덴을 격파하고 그자리에 유럽열강에 당당히 입성한
러시아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에 14관등제도를 마련하여 종전에는 신라의 골품 제도처럼
태생의 차이에 따라 정해지던 관료제도를 실적에 따라 정해지는 근대적 관료제도로
개편했다. 또 러시아 최초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기존의 토지세와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도입했다. 이 밖에도 행정, 군사,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표트르의 직접적인 지휘아래 최신식 근대화의 성공적인 개혁이 모두 완성되었다.
아비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들이었지만, 한때 모든 희망을 걸었던 황태자 아들의
비참한 죽음 앞에 인간인 이상 그도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1년 뒤, 유난히 사랑했던 또 다른 왕자가 세상을 떠나자 표트르의 몸과 마음은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표트르는 모든것을 이루어놓고 마음의 고통을 오로지 술로 풀었다.
지나친 음주로 요독증에 걸리고서도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자, 이 초인의 강인한 육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최신식 근사한 대제국 러시아를 선물받은 귀족들은 표트르 대제에게 감사함 따위는
안중에도없었다.황제가 쇠약해진 틈을 타 귀족들이 슬금슬금 과거의 기득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원통하고 비통했다. 1724년 말에는 최후의 타격이 왔다.
그가 평생 사랑했고 의지했던 황후, 예카테리나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것이다. 그 대상자인 남자를 다른 죄목으로 엮어서 처형하고 두 달 뒤,
대제는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이룩한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빈사의 황제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1725년 1월 28일이었다. 표트르가 채 마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자랑스럽게 여긴다”였을까? 이렇듯 세상한테 입은 상처투성이뿐인 황제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인한 황제라는 오명속에 위대한 개혁을 이룩해나갔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감탄했고, 러시아 땅에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다. 하지만 잔인함 뒤에 그가 지닌 슬픔이, 그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독재와 강력한 통치없인 한 시대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가죽고 위대한 인물의 호소에 대안 없는 반대만 일삼거나,
더 좋게 고치려는 노력 없이 맹종하고 안주할 뿐이었던 사람들에게도
근사한 "근대 러시아"를 선물한 표트르는 러시아의 위대한 황제였다.
(글쓴이 생각 : 동키2세님)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강력한 황제인 동시에 군사 영웅이었다.
강해보이는 이름뒤엔 남모를 아픔과 국민들의 슬픔까지 겸비한 비운의
황제같은 분을 떠오르게 만든다.
역사상 최초로 성공적인 서구화를 이끈 지도자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다.
그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아버지신 우리나라 지도자 한분의 대선배다.
상투를 자르지 않는 독재가 없이 우리나라에 근대화가 가능했을까?
내가 볼땐 근대화는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근대화 1호 국가인 러시아 역사에도 수염 자르기와 독재가 있었다.
국가에 헌신적이며 국민들의 슬픔을 지닌, 강력한 독재만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다가갈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두 세기 반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를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깝다고 봤다. 낙후된 러시아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는
유럽 변두리의 듣도 보지도 못한 약소국이었다. 폐쇄적인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도 하지 않았다. 해군도 부동항도 아무것도 없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까지 있었다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14~16세기 르네상스. 이마저도 러시아를 비켜갔다.
표트르 대제는 그런 '無'에 가까운 러시아를 43년 재위 동안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제국 으로 만들었다.
한때 천조국(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인 소련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사실상 그다.
러시아 국민들에게 표트르 대제는 ‘근대 러시아의 아버지’라 불린다.
주변국에 대한 남모를 열등감과 슬픔을 지니고있던 러시아 국민들에겐
그 당시 근대국가 대열에 끼지못하고 항상 후진국에 머물던 러시아를.
어느덧 근대화시키고 당당하게 유럽열강에 합류시키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과
'無'에서 '有'를창출해 낸 그의 능력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속 깊은곳에 깊히 남아 있다
(위키백과 참고 / 작성자 동키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