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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토르 대제의 생애와 통치(개혁)와 전쟁(요약)

담하(淡霞) 2019. 6. 28. 00:41

표토르 대제의 생애와 통치(개혁)와 전쟁(요약)
생애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와 그의 
두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탓으로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레믈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영국, 네덜란드등 서유럽 선진국가들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판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 때부터 러시아 관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1695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있지 않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절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이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통치와 개혁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문화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하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전통 러시아식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하였고,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편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행정권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러시아를 50개 지역으로 분리했다. 그 결과 지방에서 행해지는 
세부적인 문제까지 중앙의 모스크바로 보고될 필요가 없어졌다.
전쟁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모스크바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드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때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카알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알 12세는 북방전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트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9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 불리던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한 고해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하여 핀란드를 강타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1721년에 북방전쟁은 모스크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에게는 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Stenka Razin / Andre R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