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戰爭) 11세기 말부터 8차례 십자군 원정
예루살렘 성지(聖地) 서로 차지하려 중돌
문명 교류로 르네상스 계기가 됨.
東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 사원"이 있는 언덕은 유대인 聖地이기도 하다
과거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때 파괴한 유대교의
예루살렘의 성터가 있는곳이라 성전산(聖殿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유대왕국의 위대한 국왕으로 여기는
다윗이 세운 도시로 수많은 유대사원의 폐허가 있는곳이다
예루살렘은 과거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성(聖)스러운 도시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과거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Io vult)
1077년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이 도시의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곳"이라며
예루살렘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왔다
이슬람교인과 기독교인 유대교인 모두에게 성지(聖地)인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슬람세력이 에루살렘을 정복하자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1095년11월 당시교황이던 우르바노세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광장을 메운 군중에게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아니다
주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 이 말과 함께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Io vult) "고 했다
이후 200년 가까이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2. 약 8만명이 참가한 1차 십자군 전쟁
유럽 여러 나라의 귀족과 기사들은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여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프랑스, 이탈리아.서부 독일에서
각각 출정함 (약 8만명정도가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함)
쇠사슬 갑옷 호버크 와 강철 갑옷 투구등으로 무장한 십자군은
6주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투끝에 예루살렘은 1099년
십자군에 의해 함락 되었슴.
이후 십자군들은 이슬람 교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등 수만명을
"신의 심판"이라고 부르며 학살함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렘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인 술탄 살라단이
88년간 기독 세력이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됨
이후에도 교황과 유럽 영주들은 8차 십자군까지 조직하며
예루살렘원정에 나섰지만 탈횐에는 실패함.
3.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충돌과 교류
11세기말부터 200년 가까이 이어진 1차 ~ 8차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의 교류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정에서 해상운송과 무역이 부활하였고 이를 통해
서유럽에는 인도 중동 등의 물건뿐 아니라 문화 또한
대거 유입하기시작했다
이시기에 인도에서 유래한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지역으로
전파 됐고, 연금술 점성술 같은 분야도 수입되어 유럽은
이를 연구하여 각종 천문 관측기구를 발전 시켰다
이때문에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서민영 역사 교사 기고문 발췌)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1138~1193)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한뒤 관용정신을 보여주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약 1만5000명의 기독교인들이
항복하고 몸값을 내면 풀어 주었고
가난한 이들이나 노인들에게는 몸값도 받지 않았다고함.
이슬람 병사들의 기독교인 학살을 철저히 통제하여
서양 문학 작품에서는 살라딘을 인자한 인물로 그리기도했다
특히 이탈리아 작가 단테는 1300년대 초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집필한 "신곡"에서
살라딘을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 시켰다고 한다
Gulumcan - Ahu Saglam
HK